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곤도 이사미 (문단 편집) == 생애 == 원래 이름은 미야카와 카츠고로(宮川勝五郞). [[무사시]]노쿠니(武藏國) 타마군(多摩郡), 오늘날의 [[도쿄도]](東京都) [[쵸후시]](調布市)에서 부농 미야카와 히사지로(宮川久次郎)의 3남으로 태어났다. 큰누나 리에(リエ)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두 형 오토고로(音五郞), 쿠메지로(粂次郎)와 함께 장성했다. 타마는 쇼군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지로 세금이 낮고, [[부농]]이 많았다. 그래서 쇼군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고, 농민의 자식들도 도둑들로부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신변안전을 위한 [[호신술]]로 검술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히사지로 역시 농민이지만 자기 집에다 검술 도장을 만들어 검술수련을 하고, 테라코야(일본식 서당)에 다니면서 기초학문을 배웠으며, [[삼국지연의]] 같은 군담소설의 열렬한 팬을 자처하기도 했다. 5세 때 어머니 미요(みよ)가 세상을 떠난 후 아버지 히사지로는 막내아들 카츠고로의 싹수를 알아보고 이 아이에게 무사 교육을 시켰다. 에도 시대엔 적장자 이외의 아들들은 상속권에서 배제되었고, 노력하여 능력을 쌓아서 자기 앞날을 개척하지 않으면 평생 맏형 집안의 더부살이 신세가 되거나 그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으므로, 이는 단순히 아버지로서의 욕심이라기보단 카츠고로가 어른이 된 후 자립할 길을 열어주려는 배려이기도 했을 것이다. 카츠고로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후원하에 책을 읽고 검술 훈련을 받았으며, 저녁에는 옛날 이야기 대신 아버지가 들려주는 영웅들의 무용담을 들었다. 그 중 카츠고로가 가장 좋아했던 인물은 삼국지연의의 [[관우]]로, 관우가 참수당하는 이야기를 듣고 대성통곡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다음으로 좋아했던 인물은 아래에도 적혀 있는 [[카토 키요마사]]이니, 어린 시절의 곤도는 무예와 용기가 뛰어난 호걸 타입의 인물을 애호했던 모양이다. 16세 때, [[에도]]에 도장을 열고 있던 곤도 슈스케(近藤周助)의 강한 요청에 따라 곤도 가의 양자로 들어가 [[천연이심류]]의 후계자가 된다. 카츠고로는 기골이 탄탄하고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는 박력이 있어 마을에선 모두가 한 수 접어주는 존재로 통했고, 다른 사람은 보통 3년을 들여 취득하는 천연이심류 목록도 고작 입문 8개월만에 따냈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 집에 도적이 침입하자 치고 나가려고 하던 형을 붙들고 '지금은 막 침입한 참이라 경계심이 강할 텐데, 다 털고 물건을 짊어지고 나갈 때는 경계가 풀어질 테니 그때 기습해야 한다'고 하며 막은 뒤에, 그 말대로 턴 물건을 짊어지고 나갈 때 기습해 도적을 격퇴한 후에는 쫓아가려는 가족들을 말리면서 '궁지에 몰린 쥐는 쫓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쫓아가면 크게 다칠 수 있다. 물건은 어차피 찾았으니 됐다'고 했다고 한다. 이 일화가 근방에 퍼지자 이를 듣고 곤도 슈스케가 양자로 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는 것. 양자로 맞아들여진 건 1849년 10월 19일이었다. 농민의 아들인 카츠고로는 검술가 슈스케의 양아들 시마자키 카츠타(嶋崎勝太)[* 양아버지 슈스케가 천연이심류 곤도 가문을 물려받기 전의 본래 성이 시마자키였기 때문. ]가 됨으로써 [[낭인]]이긴 하지만 무사의 적을 얻어 무사 신분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일평생 [[사무라이|무사 계급]]을 동경했지만 결국 [[딜레탕트]]에 그쳤던 친아버지와는 달리, 카츠고로는 자질을 인정받아 타마(多摩) 일대에 강한 영향력을 지니며 에도 진출까지 시도하고 있던 천연이심류 종가의 후계자가 됨으로써, 훗날의 곤도 이사미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뗄 수 있었던 것이다. 정식 양자결연식이 체결된 이후론 한동안 시마자키 이사미(嶋崎勇)란 이름을 썼다가, 천연이심류 종가의 가독을 상속한 1861년 8월부터 곤도 이사미(近藤勇)라 불리게 된다. 그 전년엔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인 마츠이 야소고로(松井八十五郎)의 맏딸 츠네(つね)와 결혼하여, 1862년 딸 타마(たま)가 태어났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images.amazon.com/477870004X.09._SCLZZZZZZZ_.jpg|width=240]]}}}|| || 곤도 이사미의 또 다른 사진[* 표정이나 몸짓이 꽤나 안좋아보이는데, 이건 이 사진 찍을 때 정말로 그랬다고 한다. 당시 [[사진]] 기술이 열악하여 얼굴이 제대로 나오려면 얼굴에 허옇게 분칠을 하는 등의 준비를 해야했고 1장을 찍으려면 15분이나 걸릴 정도로 과정이 굉장히 거창하고 번거로웠다. 그 때문에 짜증이 머리 끝까지 난 상태에서 찍은 터라 표정이 저 모양이었다고 한다.] || 그 시기엔 타마 일대, 그리고 양아버지 슈스케가 에도 우시고메에 차렸던 검술도장 시에이칸을 왕복하며 검술지도에 힘썼는데, 당시엔 참신한 이미지에 목도시합에 강한 한편으로 단증 따기의 용이함을 넌지시 어필했던 속칭 막말 에도 3대 도장([[북진일도류]], [[신도무념류]], [[경심명지류]])이 문전성시를 이루어 막부 말기에 수많은 유신지사들을 배출했고, 에도의 유서 깊은 도장들도 여전히 건재했지만. 천연이심류는 둔탁하고 거친 시골검법을 고수했던데다 도장주인 곤도가 목도시합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기도 해서 시에이칸 쪽은 사실상 에도 일각에 간판만 걸어놓았다고 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이때 시에이칸에 출입하던 다른 유파 인물들과 쌓은 인맥들 중 [[나가쿠라 신파치]](신도무념류)ㆍ[[하라다 사노스케]](타네다류 창술)ㆍ[[야마나미 케이스케]](북진일도류)ㆍ[[토도 헤이스케]](북진일도류) 같은 자들은 시에이칸의 식객食客이라 불릴 정도로 곤도와 곧잘 어울렸고, 이들은 낭사대를 거쳐 신센구미 창설에 함께 하게 된다. 천연이심류의 텃밭인 타마 일대에선 곤도는 주로 문하생들과 시골 사람들을 가르치는 한편, 각 마을의 유력자들과 인맥을 만드는 데 힘써왔다. 그런 가운데 친해진 후원자 중 하나가 히노 역참(日野宿)의 촌장이었던 사토 히코고로(佐藤彦五郎)로, 그는 자기 돈을 내서 히노에 천연이심류 도장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곤도에게 수련을 받을 것을 장려하고 다녔다. 히코고로와 오노지 마을(小野路村) 촌장인 코지마 시카노스케(小島鹿之助), 그리고 곤도 이사미 세 사람은 [[의형제]]의 결의를 맺은 사이였다고 한다. 그 히코고로는 곤도에게 자기 [[처남]]을 소개시켜 주었다. 무사가 되겠다고 하면서 고용살이를 나가면 사건을 치고 돌아오고, 데릴사위 양자가 되라는 혼담을 퇴짜놓았으며, 안정된 직업을 갖는 일 없이 무사적 취미, 약제 판매의 명목을 단 방랑, 그리고 여자 꼬시기에 몰두하던 이시다 마을(石田村) 부농 집안의 막내아들, 바로 [[히지카타 토시조]]였다. 토시조는 1세 연상인 곤도와의 만남을 계기로 카에이 4년(1851)에 천연이심류에 입문하였고, 얼마 안 가 곤도의 둘도 없는 절친이 된다. 천연이심류에서 곤도를 보조하는 사범대리로 타마와 에도를 오가며 활동한 [[오키타 소지]]는 무사였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한 후 큰누나 미츠(みつ)의 남편 린타로(林太郎)가 데릴사위 양자로 가문을 상속했고, 이후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자 카에이 3년(1850), 타마 출신인 어머니와 매부의 연줄을 따라 어린 나이로 에도 시에이칸의 곤도 슈스케에게 맡겨져 입문한 경우다. 무츠 시라카와 번(陸奥白河藩)의 아시가루 소대장(足軽組頭)이었던 아버지 덕에 유파 안에서는 무사의 혈통으로서 존중을 받았으며, 타고난 재능 덕에 이미 15세 나이에 천연이심류 문하생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고작 19세 나이에 [[면허개전|개전]]에 도달했다. 한번 칼을 잡으면 인정사정없이 혹독하게 지도하는 스타일로, 농민들이 소지에게 배우기를 꺼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노우에 겐자부로]]도 타마 일대의 인물이며, 히노 센닌도신(日野千人同心) 간부 집안의 3남으로 당주인 둘째형 마츠고로(松五郎) 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사람은 좋지만 존재감이 없는 성실한 고참 이미지로 통하는 인물이지만, 사실 겐자부로도 천연이심류 개전자 중 하나이긴 했다. 위의 인물들이 신센구미 창단 당시의 곤도 파벌을 구성한 주된 사람들로, 이후 이들 모두가 신센구미의 간부가 되었다. [[1863년]], 28세 때 시위관 생활 도중에 섬길 영주를 잃은 낭인 무사대 모집에 응모하여 막부파의 [[아이즈 번]]의 자금으로 [[신센구미]]를 결성, 귀신 잡는 혹은 사람 잡는 곤도란 명칭으로서 존왕양이 세력들에게 경악과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철저히 반 막부파 박해에 앞장섰다. 그 와중에 [[히지카타 토시조]], [[오키타 소우지]]와 함께 최초의 국장이었던 [[세리자와 카모]]를 참살한 후 내부에서 숙청을 감행했다. 그로 인해 [[이토 카시타로]] 등 여러 간부의 도전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였다.[* 이런 와중에 곤도가 조직 내의 정보를 관리하고 불순분자를 색출하는 간첩으로 활약시킨 이가 바로 [[사이토 하지메]]였다.] [[보신 전쟁#s-3.1|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전투 전에 아부라노코지 사건에서 숙청당한 전(前) 신센구미 참모 [[이토 카시타로]]의 잔당(어능위사)들에게 습격당하고 그들의 총탄에 맞아 어께에 중상을 입었다. [[에도]]로 돌아와 상처를 회복한 이사미는 고요친부타이(甲陽鎭撫隊)를 결성하고 오쿠보 다케시라는 이름으로 개명했으며 와카도시요리 격으로 승진하고 10만석 다이묘로서 대우를 받게 되었다.[* 히지카타 토시조는 5만 석, 오키타 소지와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등은 각각 3만 석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타마 지역의 토착 무사와 농민이라는 보잘것없는 출신들이 막부 말의 동란으로 인해 잠시나마 벼락출세의 달콤함을 맛보았던 것이다.] 에도로 진군하는 관군을 저지하기 위해 고후성(甲府城)에서 농성전을 벌이고자 에도를 출발하지만 고후성은 이미 관군에게 투항한 상태였고, 입성 후 농성전만 생각하였던 고요친부타이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채 관군과 격돌하게 된다. 압도적인 병력차가 났던 데다가 고요친부타이는 말만 군대일 뿐이지 신센구미 잔당과 무뢰배들을 모아 급조한 집단이었던 관계로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못하고 대원들이 이탈하는 등 스스로 무너지며 대패하고 만다.[* 당시 이들의 상대들 중 하나에는 훗날 자유민권운동가인 동시에 정한론자인 [[이타가키 다이스케]](당시 총독 겸 대대 사령)도 있었다.] 이 전투 이후 신센구미 초기 멤버였던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등이 이탈하고 [[오키타 소우지]]는 병이 깊어져 신센구미를 떠나는 등, 사실상 신센구미는 소멸되고 만다. 곤도 이사미는 나가레야마(流山)에서 재기를 도모, 남은 40여 명의 인원에게 체계화된 전투 훈련을 시키며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1868년]] 4월, 에도에 진군한 관군에게 거처가 포위되었고, 곤도는 자결을 결심하나 살아서 기회를 노리라는 [[히지카타 토시조]]의 설득에 자결을 포기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받은 이름인 '오쿠보 야마토'라는 이름으로 관군에 투항한다. 처음에 [[관군]]은 그의 정체를 몰랐으며 곤도가 [[막부]]의 중신 오쿠보 야마토를 자처하자 막부의 중신을 대하는 태도로 체포 후 정중하게 호위가마에 태워져 이타바시(板橋)로 옮겨졌다. 하지만 이후 관군 중 신센구미 출신들[* 신센구미를 탈퇴하고 적대하던 [[이토 카시타로#s-2|고료우에지]]의 생존자인 카노 와시오, 키요하라 키요시]에게 정체가 들통나게 되는데 곤도의 얼굴을 아는 자가 "곤도 씨 오랜만입니다" 라고 하자 곤도는 당혹스러워하며 "무슨 소리요 나는 오쿠보요." 라고 부인하였으나 바로 뒤이어 "에이 곤도 씨 왜 그러세요. 농담하지 마세요" 라고 대꾸당했고 이에 곤도는 극도로 당황하여 결국 그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고 한다(...). 정체를 숨겼다는 비난과 함께 동정론마저도 사라져서 그 후, [[카츠 카이슈]]가 선처를 바라는 탄원을 낸 것도 무색하게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 범인이 [[신센구미]]라고 알고 있었던 [[도사]] 세력들의 주도로 아무런 예로 갖추지 않은 채 일반 죄인 취급을 받으며 참수형에 처해진다. 목은 교토의 산조(三條) 강변 모래 밭에 [[효수|효시]](梟示)되었다.--정작 쇼군은 유유자적하게 살다 죽었다. 중간관리직의 고충인가-- 당시 곤도 이사미가 참수당한 후의 상황을 그린 그림이 1868년 신문에 실렸는데, 이 그림을 통해 곤도 이사미가 [[촌마게]]를 할 때 머리카락 대부분을 미는 사키야키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ondo-Isami_decapitated.jpg?uselang=ko|곤도 이사미의 참수된 목이 올려진 상황을 묘사한 그림으로 혐짤 일 수 있으니 클릭 조심. 현재 도쿄의 에도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사세구|지세이]]는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 지세이로 보아 단순한 무사로 보기엔 상당한 [[한학]] 지식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孤軍援絶作囚俘 顧念君恩涙更流 >一片丹衷能殉節 雎陽千古是吾儔 >외로운 군대, 원군도 끊겨 포로가 되었으니, 돌이켜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눈물만 흐르는구나. >한 조각 단심으로 능히 절의에 순사하니, 천고에 전해지는 휴양[* 중국의 지명. 안녹산의 난 때 이곳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한 충신 [[장순(당나라)|장순]](張巡)을 비유하여 일컫는다. 곤도가 자신의 처지를 장순에 비유하는 이유는, 장순은 항전하다 잡혀 처형당했기 때문.]이 바로 내 동지일지니. >靡他今日復何言 取義捨生吾所尊 >快受電光三尺劔 只將一死報君恩 >적에게 항복하여 지금 새삼 무얼 말하리. 의를 취하고 목숨을 버림이 내가 귀하게 여기는 바이니, >쾌히 전광석화와 같은 세 척의 검을 받아, 그저 장렬하게 죽음으로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 한다. 여담으로 [[1913년]] 야마다 오토네라는 여인이 [[나가쿠라 신파치]]를 찾아와 자신이 곤도 이사미의 딸이라고 주장하였다.[[https://ww.namu.la/s/182bbd3958541e84df23ef942dc13889ab025de087b492a7765c133e5281ae4de3498df46a95ea61431a2193b7ee94ac44c38bbc52a5e632104268a30400b9ee352a67c624f8a19f05efb6d8b6c45281807419dd5e3e2f1ee26140764b8a7b0d|#]] 다만 친딸인지는 진위여부 판단이 불가하며, 손녀라는 이야기도 있다. 곤도 이사미는 슬하에 아들이 없어 대는 끊겼지만, 타마라는 이름의 딸이 있어 그녀를 통해 자손이 이어졌다. 손녀들 중에는 한국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룬 사람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